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5월의 시작은 축복으로 가득했다.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두 시간씩 외출이 허용됐다. 장보기, 쓰레기 배출 외에는 밖에 나갈 수 없었던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꽤나 감격스러운 변화였다. 감격스러움이 내 숨에 묻어있었다. 내 5월은 그랬다. 해가 뜨겁게 떠있을 때는 집에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밥을 해 먹고, 노래를 듣고, 넷플릭스를 보고, 가끔 타라랑 얘기를 좀 나누고 그러면서 보냈다. 오후 8시가 땡치면 무엇을 하고 있던 다 내려놓고 밖에 나가서 뛰거나, 산책을 했다. 가끔씩은 친구 집에 가서 밥을 먹고, 그러다가 10시가 넘으면 자고 오기도 하고. 나의 5월은 그랬다. 최소한으로 주어진 행복의 요소들을 최대한으로 느끼고 누리던 그런 날들이었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다른 집이나 건물들과 비교적 동떨어져 있었다. 내 방 창문으로는 기찻길이 보였고, 베란다의 큰 창문으로는 뒷마당에 있는 텃밭과 멀리 있는 산이 보였다. 내 방 창문으로 기찻길을 보면서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베란다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는 산에 가거나 친구들과 소풍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타라랑 이야기를 나눌 때면 클럽에 가고 싶어 졌다. 그 모든 소망 앞에는 '예전처럼'이 붙었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생활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게 그 당시에는 내 나름대로 현재에 충실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올 수 있다는 소망이 내가 한국에 가지 않고 스페인에서 자가격리를 하고 있었던 이유였으니깐. 매일 저녁시간에 외출은 낮시간 동안 느꼈던 답답함을 풀기에는 충분했고, 충분히 감사한 시간이었다.
아마 제일 그리운 순간을 뽑자면 이 동산에서 애들과 노을을 보던 저녁시간~ 그냥 뭔가 해가 질 때 저기에 가서, 맥주 한 캔 마시고 노래 들으면서 가만히 노을을 보고 있으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점점 해가 길어지면서 5월에는 거의 오후 9시가 돼서야 해가졌다. 해가 오래 떠있는 것은 꽤나 보기 지겨운 일이었다. 특히 밖에 나가지 못할 땐 더더욱 그렇다. 저녁시간이 됐는데도 활활 타고 있는 해를 보고 있으면 살짝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애들과 밖에서 같이 해를 보는 날에는 비로소 해가 내가 알던 해 같아 보이고,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5월은 점점 더워졌고, 해는 매일 조금씩 길어졌다.
5월의 가장 큰 이벤트는 내 룸메 타라의 생일이었다. 기존에 룸메 두 명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자가격리 기간 내내 타라와 단둘이 살았다. 타라와 나는 정말 힘든 시간을 같이 보냈다. 나는 위로를 되게 많이 받았는데, 내가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타라 생일에 동네에 남아있는 거의 모든 친구들이 다 왔다. 저날 나는 진짜 진짜 취했었다. 취해서 약간은 뿌연 기억이, 뿌연 그대로 누락되지 않고 남아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소중하고 내게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내가 취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다 같이. 그냥 웃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외 좌석에 한해서 식당이 열리기 시작한 날. 유령 동네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들리는 까탈란, 비록 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두가 나처럼 신나 있었다. 스페인의 상황은 매일매일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고, 우리는 한동안 금기시했던 희망을 다시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의 교환 학기 역시 5월과 함께 끝나고 있었고, 비로소 밖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왔을 때는 수많은 과제와 시험이 나를 집에 잡아두었다. 그냥 그렇게 스페인에서의 5월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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