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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의 창선

[교환학생 #4] 돌이켜보면 평범한 날도 많았네

 낯선 타지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적응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만큼 그다지 극적인 일은 아니었다. 매일매일이 도전이었지만, 나는 마치 전에도 해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낯선 환경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물론 난 마트 점원이 스페인어로 봉지에 물건을 담아줄지를 물어보는 상냥한 질문조차도 바로 이해 못해서 점원의 목소리에서 상냥함이 거의 사라질 때쯤 가까스로 대답하기도 했고, 정처 없는 걸음 이후에 구글맵 없이는 귀가하지도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일들은 오히려 유쾌함에 가까웠다. 장 보는 일, 귀가하는 길이 모험이 된 삶을 사는 동양의 소년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사야 하는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점원의 질문을 정확히 해석하지는 못해도 대충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가고, 동네의 여러 길들이 서서히 눈에 익어가는 과정은 놀랍게도 즐거웠다.

 

자주는 안갔지만 마음에 담아둔 거리. 처음에는 모든 거리가 다 똑같애 보였다.

 물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낯선 환경에서 오는 작은 스트레스가 일상의 전반이 됐다면 적응은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편안함을 느낄 구석이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교환학생 친구들은 영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마트 점원보다 익숙했다. 서로를 낯설어 하기에는 바깥(?)이 너무 낯설었는지,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교환학생' 커뮤니티는 어딘가 특이했다. 다국적/다문화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모두가 똑같이 낯선 상황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잘 융합되고 짧은 시간에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한다. 나와는 너무나 다르게 살아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놀고, 심지어 같이 사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익숙함이었다. 

 

나랑 사느라 고생한 룸메들
안경 바꾸기 챌린지

 

 돌이켜보면 평범한 날도 많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몇 가지 강렬한 순간들을 걷어내고나면 내가 진정 그리워하는 일상들이 보인다. 강렬한 기억들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비슷한 느낌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일상적인 기억들은 그렇지 않다. 그냥 딱 그 당시에, 특정한 곳에서, 교환학생을 간 나여야지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 있다. 그래서 공강 시간에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 때가 그립고, 맥주 한팩을 사서 친구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걷던 거리가 그립다. 이번 주말에는, 부활절 연휴에는, 학기가 끝나고는 어디 갈지 계획하던 것도 아련하다.

    

빨래 널때는 백예린 노래ㅜㅜ
거리를 거닐자

 해당 학기에 교환학생을 온 한국인은 나밖에 없었다. 동양인도 거의 없었다. 똑같이 낯설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유대감을 형성했지만 한국인, 동양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내가 느낀 어떤 특정한 괴리감은 나만의 것이었다. 가벼운 예시로 스페인의 인사법인 볼뽀뽀는 나에게는 몇 배로 더 어색했다. 이 정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유쾌한 적응의 과정이었다면, 코로나가 유럽에 전파되기 직전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동양인 인종차별은 적응의 영역이 아니었다. 전혀 유쾌하지 않았고, 친구들은 걱정해줬지만 그것은 그 당시 내가 처한 문제였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한국인으로서의 나', '한국에서 자란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독립적인 개체가 가진 특성은 다른 개체와 비교했을 때 도드라진다.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습관을 피해야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때때로 누군가는 이를 온전한 자기 이해를 위한 타인에 대한 무신경을 합리화하는 말로 사용한다. 각자의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확립된다고 생각한다. 가족밖에 모르던 애기는 유치원에서 또래들을 만나며 자신을 이해한다. 거의 같은 친구들과 6년 동안 같은 학교에서 중, 고등학교 생활을 한 나는 대학교에 와서 조금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비로소 중, 고등학교 시절에 생긴 나의 특성을 알아차렸다. 교환학생도 그 과정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나의 일상들을 스페인에서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스페인에서의 삶을 의식하며 이 글을 쓴다. 

 

되게 자랑스러웠던 기생충

 

 또 하나의 일상적인 기억이 있다. 파티가 있는 날이면 우리는 시끄럽고 비좁고 어두운 술집에서 모이곤 했다. 바깥으로 바람을 쐬거나 담배를 피우러 나온 애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작은 계단에 걸쳐 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지루한 한국에서의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반면, 대마초 흡연과 동성 결혼이 합법인 네덜란드 얘기는 내게 천국처럼 느껴졌다. 이런 대화는 질리지 않았다. 우리는 몇 날 밤을 지새우며 대화해도 모자랄 만큼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렇게 다르게 살아왔는데도 또 어떤 면에서는 너무 닮아있었다.

 

시끄럽고 비좁고 어두운 술집. 나는 도대체 왜 저러고 있을까.
시비어술 2

 

 음악은 국적을 초월한다는 진부한 말을 나는 이제 진심으로 믿는다. 브라질에서 온 루카는 나하고 여러모로 잘 맞았다. 특히 음악 취향이 비슷했는데 파티 전이나 후에 루카네 집에서 모여 음악을 듣는 시간은 너무 즐거웠다. 스페인 클럽에서는 지겹도록 레게톤을 틀었다. 루카는 자기 집에서만큼은 레게톤을 엄격히 금지했다. 하루는 스페인 친구들이 레게톤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잔뜩 채워뒀는데, 루카는 조용히 나를 불러 진지한 표정으로 파티를 위해 리모컨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루카는 스피커에서 레게톤만 나온다면 그게 설령 자기 집이어도 나갈 애였다. 어쨌든 대부분의 경우에 루카의 집에서는 레게톤을 제외한 다양한 음악이 있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만큼 빡세게 논 것 같았는데, 돌이켜보니 한참은 모자랐다. 더 많은 음악을 들었어야 했고, 더 많이 춤췄어야 했다. 지나고 나서 드는 아쉬움은 다시 기회가 온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 기억이 너무 좋으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 아쉬움이다. 돌이켜보면 평범한 날도 많았던 스페인에서의 일상들이 이제는 아쉬움이다.      

 

루카는 취하면 프리스타일을 하곤 했는데, 담날에 물어보면 부끄러워 하면서 "요맨.. 어제 그 순간에는 내가 완전히 찢고 있구나 하면서.. 감탄하면서 했어.. 요 쉿..."라고 말하곤 했다. 
탐났던 예드라의 선굴래스
생각보다 방음이 안됐던 우리집에서 처음으로 열린 파티는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기 직전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는...
내 웃음벨 사진. 나는 도대체 왜 저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