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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의 창선

[교환학생 #3] 검정치마와 맥 밀러로 코딩된 스페인의 첫 기억

 아무도 내게 스페인에 추위를 느낄 만큼의 겨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미디어가 만든 망할 놈의 정열의 나라 이미지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 적당히 두툼한 외투 하나만을 챙겼다. 바르셀로나 공항을 빠져나와 생각보다 매섭고 우중충한 날씨를 맞이하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공항에서 바르셀로나까지, 바르셀로나에서 비크까지 가는 2시간이 넘는 만만치 않은 초행길. 게다가 살면서 끌어본 캐리어 중 가장 큰 캐리어와 반대 손에는 손으로 들기엔 조금 큰 손가방. 누가 봐도 20대 관광객 같은 배낭까지 메고 있었고, 바르셀로나 소매치기와 관련된 악명 높은 썰이란 썰은 다 수집한 나는 굉장히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래서 그 역사적인 첫 초행길을 담은 사진은 몇 장 없다.

 

카탈루냐 플라자 역...? 에서 굉장히 소심하게 찍은 사진
내 예상과는 살짝 달랐던 스페인에서의 첫끼

 

 가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구글 지도에서 안내한 시간대로 열차가 오지 않았을 뿐! 덕분에 열차 기다리면서 자판기에서 샌드위치도 뽑아먹는 엄청난 여유를 부렸다. 샌드위치는 놀랍게도 맛이 없었다. 내가 아는 단어 pollo가 적혀있어서 스페인어 공부한 보람이 있구나! 하면서 샀는데 자세히 보니 영어로 치킨이라고도 적혀있었다. 나는 학교 기숙사도 늦게 신청해서 못 들어가고, 집도 미리 구하지 못한 방랑자 신세였기 때문에 에어비앤비에서 한 주를 보낼 계획으로 왔다. 호스트분이 너무 친절하게도 비크 역까지 마중 나와주셨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미안시러워서 거절할까 생각했는데 역에 도착할 때쯤에는 너무 지쳐있어 가지고 그냥 모든 게 감사했다. 호스트 분이랑 영어로 대화하면서 집에 가다 보니 아 내가 외국에 오긴 왔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에어비앤비 방

 

 방에 도착했다. 나이가 좀 있으신 호스트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평범한 아파트였고 빈 방 두 곳을 호스팅 하시고 있었다. 가격은 되게 쌌는데, 공용공간이 많은 것 치고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 나는 방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열심히 방을 보러 다녔다. 방을 보러 다니면서 동네 곳곳을 누볐는데, 나는 걸을 때 무조건 음악을 듣는다. 음악 들으면서 걷는 것은 정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내 삶의 의미 있는 활동 중 하나다. 낯선 곳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심리 수업 때 우리의 뇌는 청각 담당 부위와 감정 조절 부위가 연결되어있어서 음악을 들으면 과거에 그 음악을 들었던 기억과 감정이 더 잘 회상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스페인에 가기 전에 급하게 유튜브 뮤직으로 다운받은 앨범이 검정치마의 [TEAM BABY] 그리고 그 당시 맥 밀러의 새 앨범 [Circles] 였는데 비행기에서부터 유심카드 살 때까지 지겹도록 들었다. 요새도 이 앨범들을 들으면 자동으로 그 당시 느낌, 날씨, 공기 냄새..? 이런 게 자동 재생된다. 

 

내 취향 건물색...
내 집과 첫만남.. 처음 집보러왔을때는 비와서 그런지 너무 우중충해보였고.. 첫인상은 진짜 별로였다.
스페인 첫식당. 혼밥쓰

 

 이때는 진짜 걸어 다니기만 해도 즐거웠다. 내가 가져온 외투로는 살짝 감당 안 되는 추위가 곤란하기는 했지만 못 버틸 수준은 아니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도착 후 3일 정도 뒤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전까지는 정말 할 게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용기 내서 식당에 갔었는데 진짜 비싸고 비싼 만큼 필요 이상으로 성대하게 코스 요리가 제공됐다. 주문하는데도 정말 10분 이상 걸렸다. 내 스페인어 실력은 현지인 앞에서는 너무 왜소했다. 

 

예드라와 첫만남

 

 오리엔테이션 전날이었나..? 멘토이자 구세주인 예드라와 처음 만났다. 스페인에 오기 전 처음 예드라와 인스타로 인사하고, 예드라 프로필을 봤었는데 약간 무섭고 진짜 너무 또라이같앴다. 그래서 좀 겁먹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진짜 유쾌하고 때가 안 묻은 그런 느낌이었다. 만나서 캠퍼스 투어를 시켜줬는데 중간에 어떤 건물에서 예드라가 길을 잃었다. 그때부터 아 이 친구는 편하게 대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달까..? 어쨌든 그날 나는 오랜만에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너무 반가웠고, 또 얘기도 잘 통해서 한 3시간 동안 카페에서 얘기만 했던 것 같다. 예드라는 bts를 좋아했는데, 나는 bts 노래를 길거리에서 밖에 안 들어봤다. 나는 종이의 집에 빠져있었는데 예드라는 종이의 집을 안 봤다고 그랬다. 스페인에서 종이의 집은 약간 국민드라마 느낌이었는데 예드라는 오히려 그 분위기가 싫어서 안 본다고 했다. 뭔가 나랑 비슷해서 마음에 들었다.

 

첫 친구들
맥스와 아리아.. 이때는 내가 집이 없었는데 놀랍게도 몇일 후 아리아는 내 룸메가 된다.

 

 대망의 교환학생 오리엔테이션 날... 처음 캠퍼스에 들어갔을 때부터 난 완전히 압도당했다. 뭔가 다 벌써 친구가 있는 것 같고.. 나만 혼자인 것 같고.. 다 각자의 나라에서 같이 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 혼자 코리안.. 그때부터 머릿속으로는 신나게 혼자 5개월 동안 학교생활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 진짜 슬프구나.. 내가 꿈꾸던 교환학생 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러다가 진짜 이대로 있으면 상상이 현실이 될 것 같아가지고 얼굴에 철판 깔고 대충 혼자인 것 같은 애 잡아서 인사했다.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니 친구가 생겼고 아 혼자 생활하진 않겠구나 하고 안도했다. 혼자 걷던 동네를 친구들과 같이 걷기도 하고 좋았다. 목요일에는 비공식 교환학생 파티 같은 게 있었는데, 얼큰하게 취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이때부터 나는 파티광이 돼버려 가지고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빠지지 않았다. 술취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 에어팟에는 여전히 검정치마, 맥 밀러... 요새는 이 노래들을 들으면 지금의 감정과 기분이 묻을까봐 걱정돼서 최대한 안 듣는다. 가끔가다 들으면 정신은 그냥 이미 스페인으로...

 

술집 바로앞에 있었던 성당...? 매번 입장할때는 모르는데 나올때는 와 여기 성당이 있었네 하던곳
플라자 마요르

곧 있으면 벌써 1년이다! 시간은 하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