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취하는 것만큼 궁상맞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궁상맞은 모습을 혼자밖에 모른다는 점에서 혼자 취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술에 취하면 감성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에게 음악은 어떤 면에서는 위험하다. 평소에는 의미 없이 흘려 들었던 가사 한 줄이 눈물샘을 건드리기도 하고, 히스토리가 있는 노래는 다시는 꺼내보려 하지 않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물론 내 얘기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취하고 혼자 떠는 궁상은 당신이 SNS에 올리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른다. 궁상스러워지는 스스로의 모습은 신경 쓰지 말고, 평소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노래와 그 노래가 부른 솔직한 감정에만 신경 써도 충분하다. 지극히 나의 취향을 반영한, 혼자 취했을 때 어울리는 노래들을 준비해봤다.
1. 검정치마 - 난 아니에요
내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진 일관된 인상은 어두운 술집에서 비틀거리는 남자의 모습이다. '난 아니에요'라는 제목부터 취기가 가득하다. 가사가 취하고 나서야 내뱉는 속마음처럼 느껴져서 취하면 찾는 노래다. 물론 이 모든건 나와 알코올이 만들어낸 완벽한 허상이다.
2. 070 shake - Guilty Conscience
강렬한 베이스가 깔린 몽환적인 비트에 원한이 가득 담긴 070 shake의 보컬은 우리의 숨겨진 울분을 표하기 위해 필요한 전부가 아닐까. (왓챠식 한줄평)
3. Travis Scott - Maria I'm Drunk
"마리아, 나 취했어."
4. Radiohead - No Surprises
불후의 명반인 [OK computer]에 수록된 이 노래는 담담하다. 난 잔뜩 기교를 부리는 보컬보다는 담담한 보컬을 좋아하는데, 뭔가 억누르고 있는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감정은 억눌려있어서 더 와 닿는다. 미묘하게 높아지는 텐션을 따라가면서 듣기를 추천한다. 그럴 정신이 있다면!
5. 혁오 - 2002WorldCup
이전 곡들이 너무 어두워서 골라봤다. 혼자 방에서 취기와 함께 리듬 타기 좋다.
6. Ajia - Moonwalking
당신은 궁상맞지 않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최대한 우아하고 멋있는 척을 하자.
7. Zyah Belle - BACKWOODS
최근에 들은 노래 중 가장 긴장이 풀어지는 노래. 와인과 어울리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난 내 돈 주고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다.
8. 델리 스파이스 - 고백
이 노래만 들으면 왜 이렇게 옛날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막 가사가 공감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술 마시고 들으면 학창 시절이 줄줄이 떠오르는 그런 노래. 아 맞다 나 아직도 학생이지.
9. 레드벨벳 - 7월 7일
다음 세대가 기억해야 할 갓띵곡. 말을 아끼겠다.
10. Frank Ocean - Godspeed
이 노래를 수록하고 있는 앨범이자 내 인생 앨범인 [Blonde]의 전곡은 그냥 술과 함께 청취해야 한다. 그중 이곡이 제일 주제와 어울리지 않나 싶어 선정했다. 술을 마시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기도를 보내며 이 노래를 듣자.
11. Juice WRLD - Up Up And Away
Juice WRLD의 목소리에는 짙은 뭔가가 있다. 듣고 있으면 어떤 순간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된다. 이 노래는 그런 노래 중 하나인데, 밤과 술과 후회와 어울리는 노래이다.
12. 잔나비 - 꿈과 책과 힘과 벽
잔나비의 [전설]은 여러모로 대단한 앨범이다. 앨범의 초반부는 하루의 시작과 어울리고 후반부는 하루의 끝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 노래는 앨범의 마지막 곡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이 노래는 내게 처음부터 와 닿는 곡은 아니었다. 취하고 생각 없이 듣다가 갑자기 가사가 와 닿은 노래라 마지막으로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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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참 견디기 힘든 시국인 것 같아요. 시끄러운 술집도 그립고, 친구들과 잔뜩 취한 날들도 그립지만 무엇보다 취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노래들이 그리워서 이렇게 정리해봤어요. 그런 날이 다시 올 것이라는 지겨운 희망을 품은 채, 이 노래들과 함께 혼술 하시면서 감성적으로 취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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