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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night end up in the bed

영화 <시티 오브 갓> 리뷰 - 견디기 힘든 영화일수록 멈추기도 힘들다.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임을 당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살해 장면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는다. 죽음 하나하나가 불편하다. 조금 무뎌지는가 싶을 때쯤 또 한 번의 울리는 총성에 다시 마음이 불편해진다. ‘신의 도시라 불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촌 시티 오브 갓을 그린 영화, 시티 오브 갓’의 일차원적 감상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죽고 죽임의 연속의 영화로 압축하기는 곤란하다. 그렇게 압축하기에 이 영화는 너무 특별하다. 

 

 영화에서 살인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실에서 가장 죄악시되는 행동 중 하나인 살인은 우리가 보는 영화에서 꽤나 자주 등장한다. 살인은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되는 행위인 만큼, 살인이라는 행위가 우리에게 전하는 감정의 파동은 크다. 간접적으로 살인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편함 혹은 혐오감을 느끼거나, 피해자에 대한 슬픔과 연민의 감정이 마음속을 지배한다. 하지만 때로는 놀랍게도, 영화에서의 살인은 관람객들의 복수심을 해소해주거나, 마음속 응어리가 사라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은 살인자의 살인에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한다. 복수라든가, 정의구현이라든가, 뭐 그런거. 결국은 다 같은 살인이지만, 영화에서 일련의 스토리라인을 통해 제공되는 명분이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결국, 영화 속 살인은 영화적 장치 중 하나이다. 관람객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고, 극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 중 하나이다. 무자비하고 연속적인 살인은 여기에 등장인물의 광기까지 더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 장치로 인해 관람객이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 제작자가 의도한 대로 흘러간 것일 것이다. ‘광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 속 인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안톤 쉬거는 아주 적절한 예시이다. 한 손에 공기총을 들고 무표정으로 무자비하게 상대를 죽이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어떤 명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관람 중에 가지게 한다. 느와르물의 대명사 중 하나인 스카 페이스에 등장하는 토니 몬타나의 살인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지독한 야망. 그리고 그 야망에 스스로 눈이 먼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십 명, 몇백 명을 죽이는 것쯤은 꺼리지 않는다. 그렇다. 이 영화에서는 토니 몬타나가 가진 광기어린 야망과 열망이 무자비한 살인을 통해 표현됐다. 그렇다면 시티 오브 갓에 등장하는 무자비한 살인 역시 이와 같은 결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광기'를 대표하는 캐릭터, 안톤 쉬거와 토니 몬타나

 타고난 범죄 DNA를 갖고 태어난 이 영화의 등장인물 제 뻬게뇨는 자신이 나고 자란 시티 오브 갓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야망과 함께 커왔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범죄와 살인에 눈을 뜬 그의 사고방식은 남다르다. 대화보다는 주먹도 아닌 총이 먼저 나가는 그의 무자비함은 많은 사람들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그가 가진 야망도 토니 몬타나가 가진 야망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토니 몬타나는 자신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비상식적인 반란을 끊임없이 일으킨 인물이라면, 제 빼게뇨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은 시티 오브 갓에서 상식으로, 강력한 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그저 그가 보고 자란 것을 잘 행해낸 인물이고, 그 도시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적절한 자질을 갖춘 인물일 뿐이다. 그가 시티 오브 갓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의 대담함, 일을 진행하는 추진력은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 뻬께뇨의 잔인함과 무지비함이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광기는 이 영화에서 크게 주목할 부분은 아니다. 그의 광기가 형성되고, 용인되고, 동경 받는 시티 오브 갓이라는 사회 공동체의 광기를 주목해야 한다. 제 뻬게뇨가 어렸을 때부터 따르던 형들은 마을에서 유명한 범죄자들이었다. 훗날 제 뻬게뇨가 일으키는 범죄 수위에 비하면 약과이지만, 그들은 강도질로 돈을 모았고 어린 그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도와주며 커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도, 그를 막을 수 있는 힘은 시티 오브 갓 어디에도 없었다. 경찰들은 무능력했으며, 돈 앞에서 쉽게 굴복했다. 마을 사람들은 무자비한 그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오히려 경찰이 해야 하는 치안 유지를 그의 조직이 수행하면서부터 신뢰하고 존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꼬마들은 그를 롤모델로 삼고, 자신도 그와 같은 깡패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그의 조직에 들어가서 심부름을 하거나 약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 범죄는 대물림 되었으며, 공권력은 부패하고 힘이 없었다. 시티 오브 갓이라는 빈민촌은 악순환의 연속이었고, 그 순환 속 만들어낸 괴물이 제 빼게뇨였다. 영화의 말미에서 제 뻬게뇨는 자신이 가진 돈을 경찰에게 뇌물로 바친 후, 그의 꼬마 부하들에게 다시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재촉한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를 총으로 쏴 죽이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기뻐하며, 자신들이 세울 조직을 상상하면서 즐거워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제 뻬게뇨는 죽었지만, 시티 오브 갓의 악순환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뻬게뇨에 대한 동경심은 결국 사라졌지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것이고 시티 오브 갓은 그 인물을 다시 동경하기 시작할 것이다. 제 뻬게뇨는 도시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었지만, 사실 그에게는 힘이 없었다. 진정 힘을 가진 것은 시티 오브 갓이라는 악순환 그 자체다. 제 뻬게뇨가 죽어도 그와 같은 범죄자는 등장할 것이며, 그가 이끈 조직과 사업은 다시 누군가에 의해 생겨날 것이다. 흔히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에서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죽는 것은 해피엔딩이다. ‘시티 오브 갓의 엔딩은 어딘가 씁쓸하다. 범죄 조직에 연관된 굵직한 인물들은 죽었지만, 꼬마들이 신난 목소리로 꿈꾸는 미래는,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시티 오브 갓이 만든 괴물, 제 뻬게뇨
시티 오브 갓의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범죄 꿈나무들

 빈민촌이라는 생소한 배경을 다룬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내 머릿속을 스친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리얼하였다. 빈민촌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배경지식도 전혀 없던 내가 어떻게 이 영화에서 현실성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검열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과장도 최소화한, 꾸밈없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것이 특별한 불편함의 숨겨진 원천이다. 당연히 영화라는 작품의 특성상 어떤 대상을 100% 정확하게 담을 수는 없다. 그것은 애초에 영화의 목적이 아님과 더불어, 설사 목적이 현실 반영 그 자체가 맞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실존하는 어떤 대상을 배경으로 삼고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더라도 제작자가 보여주고 싶은 측면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연출된 장면들만 보면, 기본적으로 굳이 더하지도, 굳이 덜하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은 제작진이 철저하게 의도한 것으로, 배우 캐스팅 과정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출연 배우 중 대부분은 아마추어 배우이다. 당시에 흑인 전문 배우가 없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감독은 빈민촌에서의 삶을 현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원했다. 그러한 연유로 실제 빈민촌 시티 오브 갓 출신의 아마추어 배우들을 대상으로 오디션과 캐스팅을 진행했다. 그렇게 캐스팅된 배우들의 연기는 무언가 남달랐다. 느와르 영화 등장인물처럼 목소리를 내리깔고 위엄있게 대사를 내뱉지도 않았고, 범죄를 저지르고 내지르는 웃음은 사악하거나 멋있기보다는 오히려 천박하고 천연덕스럽게 느껴졌다. 이러한 연기는 내가 지금껏 봐온 깡패연기와 달라 어색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제 뻬게뇨의 성장과정

 영화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인 제 뻬게뇨의 모텔 학살 사건에서 이러한 부분이 잘 드러난다. 어린 시절에 형들의 모텔 강도를 보조하기 위해 망을 보고 있던 제 뻬게뇨는 자신이 범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경찰이 온다는 거짓 신호를 보내 형들을 도망치게 한다. 그 후 모텔에 들어간 제 뻬게뇨는 모텔 직원부터 투숙객까지 모조리 죽이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면서 즐거워하는 꼬마의 모습은 마치 절대 악을 묘사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만약 그의 손에 총이 들려져 있지 않았더라면, 그 웃음은 그저 새로운 즐거움을 찾은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행복한 웃음이다. 이 행복하고 순수한 웃음은 제 뻬게뇨 뿐만 아니라 영화의 전반에 걸쳐서 여러 어린 인물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범죄 행위와 천진난만한 웃음의 연합은 엄청난 괴리감을 형성한다. 그 웃음은 범죄자의 웃음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소년들의 웃음이라서 더욱 불편하다. 우리와는 아예 다른 문화, 다른 환경 속에서 익숙함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동질감은 무섭다. 범죄자가 범죄자스러운행동을 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범죄자의 형상에 부합하는 행위를 누군가가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범죄자와 우리의 차이라고 설명하며 엄격하게 구분 짓는다. 하지만 범죄자의 모습에서 우리와의 동질성이 느껴지는 순간, 기존에 그려놓은 범죄자의 형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때부터 우리는 범죄자의 개인적 특성보다 그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보통 범죄를 비롯한 타인의 행위를 외부적인 요소(사회적 규범, 외부 압력 등)보다는 내부적인 요소(개인의 기질, 성격 특성, 성향 등)에 귀인 하는 심리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오류를 억제하는 장치들이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는 집단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큰 죄책감 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이는 높은 합치성 정보를 보여주는 요소인데, 관람객들로 하여금 등장인물 개인 개인의 내부적인 특질에 집중하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제 뻬게뇨를 중심으로 그의 조직의 일원들이 웃음이나 유치한 농담, 장난, 미성숙한 분노 등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청년들의 천진난만함이나 미숙함을 보여주면서 개인의 특이성이 아닌 그들이 처한 환경에 특이성을 더 부각한다. 높은 합치성/특이성 정보를 영화에서 제공한 결과로 관람객들은 영화에서 나오는 상황 및 배경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장치들은 진짜 문제는 시티 오브 갓이라는 도시의 악순환 자체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현실에서 일어날법한 것과 현실적인 것은 다르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본 장면 대부분은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날법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현실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조직의 일원으로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그저 범죄자라는 프레임 안에서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죄자를 미화하지도 않았지만, 대다수의 청년, 소년이 보이는 어리숙하고 순진한 모습을 담으면서 인간의 보편성을 굳이 제거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보편성은 문화나, 지역을 초월하는 무언가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영화에서 개인의 광기가 아닌 시티 오브 갓이라는 사회의 광기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천진난만함

 가장 눈에 띄는 이 영화의 구성적인 특징은 부스까페라는 주인공이 화자로서 영화를 이끈다는 점이다. 부스까페 역시 범죄에 가담하는 조직의 일원인가? 아니다. 부스까페는 우리 기준에서 비교적 평범하게 사는 시티 오브 갓의 소년이다. 부스까페의 형은 제 뻬게뇨가 따르던 범죄자 형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형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의도치 않게 여러 범죄와 문제에 연루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던 그는 마트에서 쥐꼬리만 한 시급을 받으면서 정직하게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마트 주인에게 해고를 당한 이후, 그 역시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간접적으로 여러 범죄와 함께한 그는 그동안 보고 배운 것을 기반으로 버스, 택시, 카페에서의 강도질을 계획하지만, 시작도 전에 인간적인 정에 가로막혀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버스에서 강도를 실패하고 오히려 계산원과 덕담만 주고받은 후 버스에서 내린 부스까페가 친구에게 한 말이 압권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무 착하잖아”.

 

 길을 헤매고 있는 타지역에서 온 택시 기사가 도움을 청하는, (범죄를 저지를)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결국엔 그와도 친해져 버린 부스까페는 택시 기사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상파울루 출신치고는 좋은 사람 같네요”. 부스까페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린아이까지 약을 팔고 총을 겨누는 도시에서 그는 우리 기준에서 봤을 때 가장 정상적인 인물이다. 시티 오브 갓이라는 지옥과 같은 도시에서도 부스까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범죄 영화에서 부스까페와 같은 인물은 범죄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으로만 그려진다. 그 이상의 모습이 부각되는 경우는 드문데,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장르가 범죄인 영화의 메인은 어디까지나 범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티 오브 갓은 부스까페라는 인물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아예 그에게 이야기를 진행하는 목소리를 준다. 그는 무겁다면 한없이 무거운 시티 오브 갓의 이야기를 가벼운 분위기로 풀어낸다. 극악무도한 살인, 범죄가 테마인 영화에 비교적 평범한 부스까페라는 인물을 화자로 삼은 것은 크게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영화의 화자이자 후반부에는 거의 종전기자로 활양하는 부스까페

 첫 번째로 시티 오브 갓을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범죄자의 입장에서 범죄를 미화하며, 범죄를 멋있는 것처럼 꾸미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티 오브 갓의 범죄 조직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척결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의 형도 제 뻬게뇨에 의해 살인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그는 그저 받아들인다. 영화 중후반부터 진행되는 제 뻬게뇨 조직과 세노라 조직의 전쟁을 묘사할 때는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에 의해 자신의 억울함을 억누른다거나, 화자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영화적인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부스까페는 시티 오브 갓에서 범죄가 사라진다는 기대나 희망 따위를 품고 있지 않다. 범죄에 직접적으로 빠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부스까페는 시티 오브 갓의 악순환과 함께해온 인물로 매일 일어나는 범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중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적응하고 자신이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현실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사진 기자가 꿈인 그는 시티 오브 갓에 산다는 이점을 활용해 두 조직 간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일종의 종전 기자로 활동해서 신문사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는 마지막에 제 뻬게뇨에게 뇌물을 건네는 경찰의 모습을 사진으로 포착하며 부패한 공권력에 변화를 촉구할 기회를 얻었음에도 자신의 신상을 걱정하여 해당 사진을 기사에 싣지 않았다. 부스까페는 범죄자도 아니었지만, 영웅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시티 오브 갓에 사는 평범한 학생이었고, 그런 그가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었기 때문에 훨씬 현실적인 시각으로 관람객들은 시티 오브 갓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부터 평범한 삶(상)과 범죄의 삶(하)의 대조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효과는 범죄자의 삶뿐만 아니라 시티 오브 갓에 존재하는 평범한 삶도 부스카페가 보여준다는 점이다. 비록 범죄 조직의 이야기에 비하면 적은 분량이지만, 적어도 시티 오브 갓에 사는 평범한 삶의 모습이 영화에서 아예 배제되지는 않았다. 부스카페는 두 조직의 전쟁에서는 제3자였지만, 시티 오브 갓이라는 도시 자체를 제3자의 입장으로 풀어낸 것은 아니다. 시티 오브 갓의 구성원 중 한 명으로 자신을 비롯한 평범한 삶도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 부스까페가 친구들과 바다에서 여유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순간적으로 장르가 변경된 것과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그 장면은 여유롭고, 하이틴 영화와 같은 설렘을 주기도 한다. 약을 팔고,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범죄 조직의 모습과 청춘을 즐기는 부스까페와 친구들의 평범한 삶은 매우 대조적이다. 하지만 부스까페가 보여준 것은 평범한 삶과 범죄의 삶이 어떻게든 공존하는 도시의 모습이 아니다.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평범함은 조금씩 사라진다. 부스까페가 한 때 좋아했던 안젤리카는 제 뻬게뇨의 측근이자 조직의 2인자인 베네와 사랑에 빠진다. 그 둘의 사랑은 깊어지고 나중에는 시티 오브 갓을 떠나 진정 평범한 삶을 꾸리고자 한다. 하지만 도시를 떠나기 하루 전날, 베네는 제 뻬게뇨에게 원한을 품은 자에 의해 파티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다. 이 에피소드는 시티 오브 갓 출생의 사람들에게 평범한 삶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꿈과 같은 일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에 베네의 형도 범죄의 세계로부터 손을 털고 사랑하는 평범한 여자와 떠나려 했지만, 떠나기 직전 경찰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말았다. ‘시티 오브 갓에 등장하는 범죄자 중 일부는 평범함을 갈망했지만, 그것을 이뤄낼 수 없었다. 반면, 애초에 평범하게 살았던 부스까페의 친구인 치아구는 조직이 파는 마약에 중독돼 결국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부스까페에게 버스에서 덕담을 건네준 계산원 마네 갈리냐는 군인이었던 과거의 명성에 비해 평범하게 살고 있었지만, 자기 일을 꾸준하고 성실히 해나가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네의 여자친구는 제 뻬게뇨에게 강간당하고, 거기에 더불어 가족들까지 그와 그의 조직에 살인을 당한다. 범죄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은 복수심과 충돌한다. 제 뻬게뇨 조직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조직의 우두머리인 세노라는 그에게 조직에 들어오기를 권유한다. 고민 끝에 그는 민간인을 해치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드는 조건으로 그의 조직에 들어간다. 불타오르는 복수심에 그는 자신의 신념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한 것이다. 하지만 타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조직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얼마 안돼 결국 그 규칙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부스까페의 나레이션은 영화 최고의 명대사이다.

 

“1. 규칙이 있다. 2. 규칙에도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예외가 규칙이 된다.”

 

 결국 기존의 신념은 사라지고 마네 갈리냐는 완벽한 범죄자가 되었다. 그 역시 평범함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변화는 부스까페라는 화자에 의해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다. 영화 초반에 부스까페와 친구들이 바다에서 여유를 즐기는 모습, 버스에서 마네 갈리냐가 건네준 덕담과 같이 영화 초반에 잠시나마 존재했던 평범함은 영화 후반에 남아나질 않는다. 베네와 베네의 형이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삶이 건넨 사랑은 범죄자의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평범한 삶을 이루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반면, 범죄자가 평범한 삶에 증오를 심어서 그 삶을 범죄자의 삶으로 바꾸는 것은 순식간이었다.시티 오브 갓에서 평범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스까페와 그의 주변 인물들이 영화 초반에 잠시나마 보여줬던 평범함은 더더욱 마음이 아프다.

 

베네의 형도, 베네도, 결국 시티오브갓을 벗어나기 직전 죽음을 당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내내 강조한 키워드는 불편함이다. 하지만 불편함의 정도가 영화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혐오스러운 장면이 많아서 이 영화가 불편한 것이라면, 불편함을 잘 전달했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이라는 감정의 깊숙한 곳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숨어있다면 적극적으로 파헤쳐본 후 평가를 내려야 한다. 그 결과, 이 영화가 특별히 불편하게 느껴진 이유는 개인의 광기보다는 사회의 광기가 더 강조되어서 여러 범죄가 묘사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묘사를 현실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여러 장치, 색다른 구성을 이용했다는 점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내내, 범죄자의 개인적인 특성보다는 사회 시스템 재정비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러한 내 생각은 절대 범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영화를 본 후 내 머릿속에는 몇몇 불편하고 위험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제 뻬게뇨가 그렇게 자신의 조직이 신문에 나는 것을 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시티 오브 갓의 실태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자신과 자신의 조직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왜 그는 자신이 이룬 범죄 업적에 대한 인정을 갈구했을까? 자신이 시티 오브 갓에 꼭대기에서 충분한 돈을 벌고, 동경을 받고 있음에도 왜 세노라가 차지한 구역을 뺏지 못해 안달이 났을까? 그가 한 행동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가진 인정욕구, 질투심, 승부욕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들일까? 이 영화를 관람한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제 뻬게뇨를 비롯한 인물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묘하게 이해되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의 심리적 상태 때문이었을까? 그들의 삐뚤어진 자기실현은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것일까? 이 영화는 끝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