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수업 중, 교수님은 미래의 가족 형태에 대해 질문하셨다. 아무리 시대가 급속도로 변한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가족 형태는 변함없을 것 같았다. 전통적인 가족 형태의 견고함을 믿어서라기보다, 다른 형태의 가족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분명 변하긴 할 것이고, 이미 어느 정도 변하고 있다. 결혼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가지지는 않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아이를 키우더라도 배우자는 없는 가족도 있다. 과거 어쩌면 현재에는 가족을 결혼, 출산, 육아 등이 결합된 패키지로 인식한다면, 미래의 가족은 개인의 선호 또는 필요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에 '필요'나 '선호'와 같은 단어를 붙이는 게 아직은 어색하기만 하다.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가족은 필요에 의해 형성된 가족이다. 쇼타(아들)와 유리(딸)는 폭력이 없는 가정에서의 보삼핌이 필요했다. 오사무(아빠), 노부요(엄마) 부부에게는 거주지와 돈이 필요했다. 집을 나온 아키(큰딸)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앞둔 노인 하츠에(할머니)는 죽기 전 자신을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했고, 집과 연금을 통해 자신을 보살펴 줄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는 일종의 거래와 같다. 각자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서로 연결되었고, 각자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한다.

영화는 쇼타와 아빠가 콤비를 이뤄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쇼타가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은 생필품, 음식 등을 훔치는 좀도둑질이다. 영화의 원제목을 직역하면 '좀도둑 가족'인데, 다소 적나라한 제목에서부터 유추해볼 수 있듯이 도둑질은 이 가족의 본질이다. 도둑질은 6인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이다. 할머니의 연금과 부부의 월급의 부족한 부분을 충당한다. 또한, 도둑질은 가정교육이다. 영화 후반부의 아빠 오사무의 대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도둑질은 그가 아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도둑질은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의 유리와 쇼타는 돈을 벌 수는 없지만, 도둑질을 통해 가정에 기여할 수 있었다.

좀도둑질은 아이들의 의사로 시작된 행위는 아니었지만, 강제적으로 이뤄진 행위도 아니었다. 새롭게 가족에 합류한 유리가 같이 도둑질에 가담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쇼타에게 아빠 오사무는 이렇게 말한다.
"유리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같이 살기에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쇼타는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 도둑질은 쇼타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 범죄이기 이전에 자신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수단이었다. 쇼타는 도둑질을 통해 가족에 기여하면서 '마음 편하게' 가족들과 생활할 수 있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행하는 폭력이나 강제성은 이 가족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이 가족의 전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필요'다. 좀도둑질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각자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가족이라기엔 사랑이 넘쳤다. 바다에서 뛰어노는 가족들을 보면서 자그맣게 고마웠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모습, 팔에 남겨진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엄마와 유리의 모습, 할머니의 죽음에 서럽게 우는 아키의 모습에는 사랑이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가족의 구성원 대부분은 기존의 가족들에게 배척당하거나 사랑받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막내 유리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다. 쇼타의 경우 차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친부모에게 버림받았을 확률이 높다. 노부요의 전남편과 관련해서 두 부부는 숨겨야 하는 과거가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는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고, 서로를 아낀다. 서로를 아껴주는 것이 이 가족의 애초에 목적이 아님에도 말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기존의 가족형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가족의 본질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면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 당위성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무조건적인 사랑은 꼭 혈연관계에서만 탄생하는 것일까? 아니 그전에, 혈연관계가 언제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동반하는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또 내가 품은 환상이지는 않을까.
결국 사회의 기준에서 이 가족은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가족을 표현하는 몇 가지 죄목 앞에서 그들이 서로 느꼈던 애틋한 마음은 초라해진다. 가족이 될 수 없었던 '어느 가족'은 끝내 해체되고 유리는 친부모에게 돌아가고, 다시 폭력에 노출된다. 엄마 노부요가 아이들에게 준 사랑은 형사 앞에서 떳떳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 포기한 그녀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엄마가 아니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만들어진 가족은 사회와 호흡할 수 없었고, 가족이 될 수 없었다.

가족의 중심이었던 할머니 하츠에가 진정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혼자 살기엔 넓었던 집이 빈 공간도 안 보일 정도로 좁아졌고, 그 덕에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을 떠날 운명이었던 그녀는 떠나고 누군가에게 빈 자리로 남았다. 어쩌면 그녀의 '필요'는 가족들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 가족이 진짜가 아니라도 말이다. 그러나 '진짜 가족'을 규정하는 우리들의 정의는 편리할지언정 너무 낡았다.
미래에 어떤 형태의 가족이 생겨날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형태보다 중요한 본질을 말한다. 이 가족이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닌, 이 가족이 가지고 있는 것에 주목해보자. 그것이 바로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본질이지 않을까.

'Movie night end up in the bed'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이 최고의 명분이다 - 넷플릭스 드라마 <오자크 시즌 1> 가벼운 리뷰 (0) | 2021.01.07 |
---|---|
영화 <시티 오브 갓> 리뷰 - 견디기 힘든 영화일수록 멈추기도 힘들다. (2) | 2020.12.03 |